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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름

궷물오름 (2021. 01. 24)

점심을 먹고 궷물오름으로 왔다.

1100도로를 가다 어승생 삼거리에서 산록도로로 진입하고 7km 정도를 달리면 좌측으로 경찰특공대 건물이 보이고

그 아래에 제법 큰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궷물오름이나 족은노꼬메를 다녀올 수 있는 진입로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산록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큰노꼬메주차장이 나온다.

큰노꼬메오름은 족은노꼬메오름, 바리메오름, 족은바리메오름을 세트로 연결해서 자주 왔었다.

하지만, 궷물오름은 오늘이 첫 방문이다.

오늘은 궷물오름, 노꼬메오름, 족은노꼬메오름 순으로 다녀올 예정이다.

 

오름 주변에 있는 샘은 여지없이 오름 작명에 기여를 한다는 것은 어쩌보면 제주 오름의 법칙이다.

오름 북동쪽 분화구위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이 샘을 궷물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오름이 궷물오름이라고 명명된 것은 당연지사.

 

 

 

첫사랑만 설레는 것이 아니다. 오름을 처음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좌틀하면 족은노꼬메, 우틀하면 궷물오름 가는 길이다.

 

 

 

 

 

 

 

이 웅덩이가 궷물이다.

이곳에서 소나 말이, 목동까지 물을 먹었다고 한다.

 

 

 

궷물오름은 현재는 장전리마을공동목장이 형성된 중심이 되는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오소장이 위치했던 곳이여서 제주 목축문화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제주 중산간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사람들은 몽골인들이였다.

고려와 일본을 연결하는 요충지라는 점때문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제주를 직접 관할지역으로 삼은 몽골은

제주 중산간 지역이 기후가 온화하고 맹수가 없으며, 초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목축의 최적지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몽골마 160필을 들여와 지금의 성산읍 수산1리 일대에 탐라목장을 설치하게되는데,

이것이 제주도 목장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목축 세계1등 몽골의 제주지배 98년동안 제주 목축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조선왕조로 이어져 제주도가 군마생산지로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세종 때 제주도 출신 고득종의 건의로 중산간 지역에 잣성을 지역민들로 하여금 축성하도록 한다.

이때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소장 체계를 갖추게 된다.

한라산 북부지역에 1소장(구좌읍), 2소장(조천읍), 3소장(제주시), 4소장(제주시,애월읍), 5소장(애월읍), 6소장(한림,한경면)을 두었고, 

한라산 남부지역에는 7소장(안덕면), 8소장(중문,하원,도순동), 9소장(남원읍), 10소장(표선면)을 두게된다.

 

 

 

이러한 목장 조직체계는 조선시대 중기에 다소 증감 등 변동이 있었지만 후기까지 대체로 이어지다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국영목장의 틀이 무너지고 일제시대에는 부락별로 목장조합을 조직하게되고,

해방 후에는 마을공동목장으로 재편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오름을 오르다 보면 '테우리 막사'를 만날 수 있다.

'테우리'는 마소를 관리하는 목동을 일컫는 제주 말이다.

그들이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질 경우 피난처로 이용했던 곳이 바로 테우리 막사이다.

 

테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미션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밭밟기'였다.

화산섬 제주는 예로부터 척박한 땅, 거기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많이 와서 제주 밭은 농사 짖기가 쉽지가 않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다시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면, 그 씨앗들이 바람에 날라가고 폭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기위해 밭밟기를 필수적으로 해야만 했었다.

이 중요한 밭밟기 과정에서 우마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이때 노련한 테우리는 그 진가를 발휘했었다고 한다.

 

 

 

 

 

 

 

 

 

 

 

좌 족은노꼬메, 우 큰노꼬메.

궷물오름 입구에서 이 두 오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갈림길이 있는지라

주말에는 운동삼아 이곳을 찾는 도민들이 많다보니 궷물오름 주차장은 언제나 만원이다.

 

 

 

 

 

 

 

 

 

 

 

 

 

 

 

궷물오름 정상만을 생각하며 궷물오름을 찾는 사람은 거이 없을 것이다.

궷물오름 정상은 볼품이 없다.

 

 

 

궷물오름 내려서서 바라본 큰노꼬메오름의 모습.

이제 이곳을 가로질러 큰노꼬메오름로 간다.

 

 

 

족은노꼬메오름의 모습.

 

 

 

궷물오름 쪽으로 뒤돌아 본 모습.

 

 

 

여기서 부터 판타스틱한 길이 펼쳐진다.

 

 

 

 

 

 

 

세종때 국영목장 10소장 체계를 갖추며 쌓았던 잣성은 하잣성이다.

우마가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해발 150-250m 일대에 돌담을 쌓은 것이다.

그 후 우마가 한라산 삼림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동사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해발 450-600m 일대에 다시 돌담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것이 상잣성이다.

우리가 노꼬메오름 둘레길에서 만나게 되는 잣성이 바로 상잣성이다.

 

 

 

잣성은 하잣성, 상잣성, 중잣성 순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잣성은 15세기 초반부터, 상잣성은 18세기 후반부터 축조되었으며, 중잣성은 축조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잣성은 농경지 피해 예방을 위해 축조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산간 지대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지역농민들의 농경지 개간을 금지함으로써 이 지대를 목장지대로 지정한 다음 안정적으로 말을 사육할

목마장을 설치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중시했던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타당한 추론이다.

 

 

 

잣성 건립은 제주 주민들을 부역형태로 동원한 국가주도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제주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점에서 잣성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적지 않다.

 

 

 

공부를 해보니 새삼 잣성에 더욱 눈길이 간다.

지금은 이끼가 끼어 아름답게 보이지만, 저 돌에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얼마나 많이 묻어 있을꼬.

 

 

 

저기 잣성 축조에 동원된 분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