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내려오니 안내판이 하나 보였는데,
거기에 '주산산덕룡봉 1.6km'라고 쓰여있고 화살표가 우측을 가리키고 있어서
왔다리 갔다리하며 그 입구를 찾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한 분을 만나서 길을 물어보니 반대편 위로 가라고 하신다.
'6시간 걸린다. 지금 어느 세월에 가냐'며 딱하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다시 내려섰던 지점으로 오르막을 올라오는데 멘붕오더라.
너무나 찾고 싶었던 그 길이 드디어 나타나셨다.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을,
아니 양란재배장을 가르키는 곳으로 왔더라면 최단 거리로 바로 이곳으로 내려왔을 것인데....
설상가상, 나는 여기도 또 뻘짓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정표가 가르키는 곳으로 들어서서 덕룡봉으로 향했어야 했는데,
정신나간 난 앞으로 나있는 이 길을 무작정 걸어갔던 것이다.
가면서 요런 사진도 찍으면서...
그러나 알바의 진리, 어느 순간 느낌이 온다는 거...
그랬다, 제법 걷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
나 지금 뭐하고 있지, 등산 왔잖아....근데 난 지금 올레길을 걷고 있네.
또다시 난 빽을 해야만 했다. 나 오늘 왜그러지.
작천소령에서 빵이랑 과일이랑 먹으면서 충분히 쉰다는 것이 당초 계획이였으나,
연이은 벌짓으로 40분 이상의 시간을 날려 먹으니 갑자기 맘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날은 덥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덕룡봉을 향해 치고 오르는데
갑자기 등산 의욕이 확 꺾기는 기분이 들더라.
남주작산 뒤로 강진만이 보이고 있다.
제주 오름 비스무리한 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셀 수 없이 이어졌던 주작산의 암봉들, 두륜산, 그리고 해남 들판과 강진만...
넘 쉬고 싶었지만,
시간을 많이 지체한지라 급한 맘에 계속 오른다.
드뎌 덕룡봉 정상에 도착한다.
목이 몹시 말랐다.
그제서야 알았다. 나에게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고작 삼다수 500ml 두병을 가지고 산행을 시작했네.
주작산에서 이미 한병은 마셨고, 덕룡봉 정상에서 한 모금을 들이키니 남은 물이 이제 300ml 정도...
배낭에는 빵 하나, 과일 조금 있고.
맨날 제주 오름만 오르다 보니 소박함이 몸에 베었구나.
그래도 덕룡봉 정상에서 사진 하나는 찍어야겠지.
얼굴에 걱정이 묻어있다.
좀 쉬고 싶었지만, 그냥 간다.
이런 절경이 바로 에너지다.
덕룡에도 진달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남 들녁과 강진만,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천관산이겠지.
다른 님들 블로그에서 보았던 그 멋진 곳이 어느덧 나타났다.
진달래가 야속지게 피어있는 것이 좀 아쉽지만,
덕룡산의 암릉미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서봉은 언제쯤 나타날까.
주작과 덕룡은 풍기는 이미지가 좀 달랐다.
주작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여성미를 풍긴다면,
덕룡은 좀 더 우람한 남성미가 느껴졌다.
덕룡에서는 제주 오름과 같은 봉우리들을 좀 볼 수 있었다.
제주 오름에도 저렇게 진달래가 핀다면 정말 이쁠텐데.
멋진 능선길이다.
진달래와 덕룡의 우람한 암릉미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덕룡산 하일라이트 구간 아닐까.
그래, 봄에 이런 길도 함 걸으면서 살아야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고 싶은 길이다.
서봉은 아직도 나올질 않고....
옹기종기 앉아서 뭘 그렇게 맛있게 드시나요.
여기도 옹기종기...넘 부럽다.
배고픈데 딱히 먹을 건 없고,
목은 엄청 타들어가는데 마실 물은 부족하고...
오직 나의 희망은 쬐끔 남아있는 과일, 동봉에서 입에 다 털어넣을 생각이다.
근데, 아직 서봉도 나타나질 않았으니...
지나온 능선들...
마침내, 서봉에 도착했다.
육구종주때 서봉이 그렇게 나타나질 않더만,
오늘도 서봉은 쉽사리 만날 수가 없었다.
'저기가 서봉이겠지'하는 생각을 몇차례나 했는지 모른다.
이제 동봉은 0.25km.
숫자만 보면 별거 아닌데.....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몸이 많이 지쳐있어 저 길이 길게 느껴졌다.
주작, 덕룡 종주 12km 조금 넘는다. 12km라는 숫자만 보면 까짓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근데, 걸어보면 장난이 아니다.
나도 12km에 현혹되어 생수 2병 들고 설렁설렁 왔다가 지금 큰코 다치고 있는 중이다.
동봉이 보이고 있고, 드디어 석문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 동봉이로구나. 그놈 참 가파르다.
이걸 또 어찌 올라간다냐.
뒤돌아 본 서봉의 모습.
악전고투 끝에 동봉에 우뚝 섰다.
계획대로 남은 과일을 미련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물도 남김없이 마시고 싶었지만 비상식량 느낌으로 딱 한모금을 남긴다.
한모금, 갈증 해결에 무의미한 양이지만 있고 없고가 멘탈에 영향을 줄 것같았다.
없으면 더 간절해지니까.
이제 소석문까지는 2.5km.
이 2.5km가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이게 마지막 암봉이겠지'....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계속...계속 나타나면서 사람을 질리게 하더라.
이후 사진을 거이 찍지 못했다.
초반에 워낙 사진을 많이 찍은지라 밧데리도 부족했고,
너무 힘들어서 찍을 생각도 없었고...
정말...정말 저기가 마지막 봉우릴꺼야...그랬는데 2개가 더 나오더라.
마지막 험한 가파른 길로 주작, 덕룡 종주산행 피날레를 장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긴장케하는 12km였다. 이런 12km는 없었다.
준비 부족으로 고생을 자초한 산행이였지만,
진달래 산행의 끝판왕을 알현한 소중한 경험이였다.
끝까지 아껴두었던 물 한모금을 입에 털어 놓으니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끝마친 후련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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